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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라 Ⅷ : 공동체 내부의 위기. 느5:1~13절. 08.04.2019

세상에 완벽한 공동체는 없다. 완벽한 공동체가 이 땅에 존재할 정도로 우리 인간들이 성숙하다면, 또 훈련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실 필요도 없다. 우리 스스로 도 닦아서 천국 가면된다. 그렇기에 인간들이 함께 어우려져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공동체 안에 필연적인 갈등이 생길 경우 어떻게 이겨내고 어떻게 새로이 든든한 성벽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인가?

1.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부의 말로 인한 공격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에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주를 기억하라(자카르)’고 선포했다. ‘자카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직접 개입해서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할 때에 주로 사용되어진 말이었다. 즉, 이 문제는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선포를 들은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그들은 마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처럼 완전 무장을 하고 공사를 계속해 나갔다. 갑옷, 창, 방패, 활을 들고 한 손에는 일을 위한 도구, 다른 손에는 병기를 잡고 일을 하고, 허리에는 칼을 놓지 않았으며, 심지어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무기를 들고 이동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반드시 알고 지켜야 하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다. ‘자카르’는 하나님이 직접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선포이다.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으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것을 사용하셔서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경이로운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항상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요. 온 세상의 주관자임을 알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이미 하나님이 절대자요 주관자임을 깨달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절대자임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인지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맛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우리의 힘과 노력과 열심과 정성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신 것이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땅에 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백성들이 느헤미야에게 요청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을 향한 긍휼과 사랑으로 인하여 느헤미야가 스스로 결정해서 그 땅에 온 것이다.

그러나, 성벽 건축은 백성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일구어 내듯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를 지키고, 세우고, 일으키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한다. 혼자 행하지 않으시고, 신자가 감당해야 할 부분을 맡겨 놓으시고, 이 거룩한 사역에 당신의 백성과 함께 세워간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2. 이스라엘 내부의 상황

사실 성벽 공사가 진행 중이던 이스라엘의 내부 상황은 정말 좋지 않았다.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서, 자녀들을 종으로 팔고, 세금을 내기 위하여 집과 포도원을 저당 잡혀야 했다. 그런데, 많은 백성들이 굶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귀족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을 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난이 자신들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앞서 4장에 나온 문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정적인 넋두리였던 반면에, 이제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향한 공격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같은 동족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내부의 갈등들이 표면으로 올라온 것이다.

공동체 안에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공동체의 유익보다 자신의 유익과 안전과 실리만 챙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런 사람들을 내치고, 뿌리 뽑아 헌신하는 사람들만 존재하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런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 솎아 내면 남는 사람도 없고 언젠가 나도 내침을 당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면 그들을 한 배를 탄 일원으로 여기고 참아주고, 인내하여 가슴으로 품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참 힘이다.

3. 느헤미야의 처리 방법

성경은 분노가 곧 죄라고 얘기하지 않는다(엡4:26). 분노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많은 감정 중의 하나이다. 만일 분노라는 감정이 없으면 무언가 옳지 않고 부당한 일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감정의 통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는 없어져야 하는 죄의 문제가 아닌 다스림의 문제로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상을 뒤엎었을 때에 ‘분노’를 철저히 통제된 감정으로 사용(!)하셨듯이, 그의 모형 되는 느헤미야 역시 이러한 문제가 있을 때에 철저히 통제된 분노를 사용했다. 그는 얌체이고, 내치고 싶은 자들인 귀족과 민장들을 좋은 말로 설득하거나 회유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크게 노했다(6절)’ 그러나 그 분노는 완벽히 컨트롤된 의도된 분노였다(7절).

이 일을 통하여 느헤미야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참다운 지도자라는 공감을 이루었고, 귀족들과 민장들에게는 엄한 꾸지람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받은 것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회복하게 되었다.

내가 속한 공동체, 그것이 가족이든, 직장이든, 교회이든 간에 그 공동체가 살아나는 길은, 공동체 가족들의 희생과 결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깨닫는 것으로는 안 된다.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가 사는 길이고, 공동체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속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e.g: 가정, 직장, 교회 etc...)

3. 내 인생에 가장 긴장되고, 두려웠던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 때 나를 견디게 해 준 힘은 무엇이었는가?

4. 내 인생에 정말 보고 싶지 않았던 (혹은 현재) 사람이 있는가?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는가?

5. 나는 화를 잘 내는 편인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6. 내 속의 분노를 해결하는 나만의 방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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