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2025. 고린도전서 강해(11) 한 걸음 씩 더 가까이. 고전6:1~11절
- Soo Yong Lee
- 6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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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는 분파, 유치한 영적 은사, 지혜 자랑, 음행 등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결국에 이들은 세상 법정에 서로를 송사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를 두고 바울은 강하게 이들을 책망했다. ‘왜 불신자들이 너희를 판단하도록 하느냐!’라는 것이다.(6절)
바울의 이 말은 단순하게 ‘신자는 세상 법정에 가서는 안 돼’라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도 총독 베스도 앞에서 가이사에게 상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행225:11) 이런 점을 비추어 보면, 바울의 책망은 세상 법이 기독교가 가진 율법에 비해서 열등하거나 우습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원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 복음의 원리
당시의 로마법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법체계가 상당히 발달이 되어 있었다. ‘법의 제국’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왜 바울이 그들에게 송사하지 말라고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가진 가치관과 기독교인들이 가진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그들은 공정하다. 합당한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복음의 가장 큰 원리인 십자가 원리로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도 없고, 우리가 그들의 판단을 따라서도 안 된다.
세상은 누군가 나를 때리면 때린 만큼 법의 심판을 받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한다.(마5:39) 오히려 ‘우리에게 상해를 입힌 자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마5:44) 즉, 세상의 원리와 복음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교회의 일을 세상 법정에 맡길 수가 없다는 것이지, 그들의 판단이 불공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신자는 원수를 끌어안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내용을 그들에게 맡길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요구는 세상 보다 크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수를 믿은 후, 그의 전 생애를 보면, 그를 죽이려고 하고, 돌로 치고 감옥에 넣었던 자들은 이방인이 아니다. 동족 유대인이다. 결국에는 유대인의 고소가 가장 큰 원인이 되어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바울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는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에 대하여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했다.(롬9:1) 자신을 죽이려하고, 핍박하는 것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제발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한다.(롬9:3)
이 바울의 고백은 복음을 심도 있게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eg:모세,스데반...)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는 복음, 즉 십자가의 원리가 적용되고, 지배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어려움을 통하여 모두가 다 성숙의 길로 가야한다. 이 성숙은 ‘나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느라 송사하지 않았다’는 액면적인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그 안에 깃든 복음의 원리를 추구할 때에 만이 가능한 신자의 성숙이다.
● 신자의 구원
우리는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바울은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한다.(9,10절) 문제는 이 죄들은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도 동일하게 범하는 죄이다. 아무도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럼 모두다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11절을 오해해서 생긴 것이다. 이 구절의 원어는 구원 받기 이전의 상태와 후의 상태를 '그러나‘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대조되어있다. 그런데 한국말은 과거형도 애매할 뿐 아니라(있더니...) ’그러나‘라는 단어도 빠져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오해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너희가 과거, 구원 받기 이전 시절에 많은 죄를 지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은 이 후에는 그 분 안에서 거룩함과 의로움을 입었다. 이미 깨끗해졌다. 그런데 왜 너희는 구원 받기 이전의 모습으로 사느냐. 왜 은혜로 얻은 그 구원의 가치를 훼손하느냐”라는 것이다. 즉, ‘구원을 받았다면, 당연히 구원 받은 자 답게 살라’는 권고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 감격과 은혜에 머무르고 있으면 안 된다. 내 신앙의 수준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지속적으로 신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구원의 한 내용이다. 그 수준의 변화는 때로는 교회 안의 다툼으로, 분쟁으로, 관계의 문제로 찾아온다. 그래서 이것을 정의롭게 해결하려고 세상 법정으로 가서 답을 내면 안 된다. 그 수준의 변화는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가운데 인내로 빚어지는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가장 큰 차이가 있다. 다른 종교는 그들이 신앙을 통하여 자신의 소원과 욕망을 성취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존재의 변화이다. 내가 하나님께 잘 보여서 무언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죄의 자리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변화를 이루었기에 그 존재에 걸맞는 삶으로 살아가는 자,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원리이고, 복음의 본질이며,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 때에 비로소 성경이 약속한 그 복, 주변의 모든 사람을 축복하고 나눌 수 있는 복된 인생으로 빚어지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교회가 분쟁을 일으키고 소송까지 가게 된다면 교회에 대한 시선이 어떠할 것 같은가.
3. 오른뺨을 때릴 때에 왼뺨을 돌려대 본 적이 있는가 혹은 그런 신자를 본 일이 있는가.
4. 내가 동족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바울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5. 기독교 신앙은 내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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