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2025. 고린도전서 강해(18) 신자의 경주. 고전9:24~10:5절
- Soo Yong Lee
- Aug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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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의 삶으로 갈 확률이 아주 높다. 왜냐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단어의 의미와 아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단어 ‘믿음’이 그러하다. 실제 기독교의 ‘믿음’은 이 땅에 없는 개념이다. ‘믿음’을 이해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율법’의 상대 개념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율법은 내가 노력하고 수고하는 공로이다. 이것의 반대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가 기독교의 ‘믿음’이다.
기독교의 ‘절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종교적 절제인 금욕, 청렴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 ‘절제’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행여 이원론자가 주장하고 있는 ‘금욕적 차원’으로 이해할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쓰지 않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며 신자가 가져야 할 절제는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방향, 그 목표는 ‘성도를 유익하게하며, 영혼 구원’을 위한 절제이다.
그 방향성이 맞으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삶의 내용이 자랑스러워진다. 세상적으로 못나고, 부족하고, 바보스럽고, 치사한 것마저도 신자가 가져야할 자랑으로 그 패러다임이 바뀐다. 바울은 그가 교회와 주의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큰 헌신과 수고를 했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약한 부분을 자랑한다. 그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성벽에서 도망친 이야기이다.(고후11:32.행9:25)
왜 이런 비겁한 이야기가 자랑이 되는가.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절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이 땅을 떠났다. 그러나 자기가 장렬히 죽어서 아름답게 순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기의 사명과 가야할 방향을 분명히 알았다. 앞으로 주의 나라를 위하여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당장의 순교를 피하고 대피를 택한 것이다. 그렇다. 영혼 구원이라는 방향성을 두고 오늘의 열정조차도 참아내는 것. 그것이 성경의 절제이다.
바울은 이 방향성을 운동 경기와 그 선수들에 비유한다. 운동 선수가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을 절제하듯이 우리 역시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절제하고, 훈련 받는 것이 마땅함을 이야기한다. 복음이 지식으로 끝나지 않고, 내 삶의 일부가 되도록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 본문에 대한 오해가 몇 가지가 있다.
● 본문에 대한 오해
1) 훈련: 우리는 ‘신앙의 훈련‘을 ’절제‘라는 말과 맞물려 이렇게 적용한다. ‘내가 아닌 십자가가 드러나도록 나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내가 죽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십자가를 ‘자기 비움’으로 적용하여 자꾸 나를 죽이려고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죽지 못해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바울이 십자가를 언급하며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했기 때문이다.(빌2:7) 그래서 이 ‘비우다’라는 단어 ‘케노시스’를 자기 비움으로 연결해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삶으로 연결하여 나를 죽이는 훈련을 한다.
그러나 이 단어 역시 일반적 단어와 개념의 차이가 있다. 사실 이 ‘자기 비움’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나를 비우고, 내 마음을 비우는 것은 대승 불교의 ‘공사상’이다. 내가 없어지면 주변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것이 평안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자기 비움은 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크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이 되어 나를 위해서 죽을 만큼 나는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의미가 예전에는 영광의 하나님이었는데, 이제는 나를 비워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를 비우고 인간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빈자리를 채울 만큼 가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 영광의 하나님이 기꺼이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의 자기 비움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훈련은 나란 존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자기 비움’이고, ‘십자가’이다.
2) 구원
바울은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고 말한다.(27절) 마치 이 구절로만 보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항상 책의 저자가 가진 평소의 신학 사상과 성경의 앞 뒤 문맥을 기준하여 해석해야 한다.
바울은 항상 우리의 구원은 성령으로 인치고, 보증을 했다고 말해왔다.(고후1:22) 특별히 앞서 3장에서는 내 공적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미 언급했다. 다만 공적이 불타면 상이 없다고 했다.(3:14)
지금 27절이 딱 그 말이다. ‘버림받는다’는 말은 ‘구원 상실’이 아니라, ‘경주의 상에서 실격’ 혹은 ‘복음 사역자로서의 자격 상실’을 의미한다. 이것을 확실하게 예를 든 것이 모세의 출애굽 비유이다.(10장)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당시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을 ‘침례’로 비유한다. 침례는 ‘연합’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현재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그 분과 하나가 되었듯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속하여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10:2)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그렇기에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비유이다. 즉, 한번 얻은 구원에는 상실이 없다.
바울은 이와 더불어 한 가지 사실을 주지한다. 침례를 받고, 성찬을 받은 자일지라도 그들 중 다수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더라는 것이다.(10:5) 바울이 그 점을 꾸짖는 것이다.
신자란 하나님의 자녀로 값없이 구원 얻은 자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자다운 삶을 사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신자는 경기장의 선수처럼 경기를 위하여 스스로 훈련하며 절제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할 때에 성경의 용어 중에 가장 개념이 안 잡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단어인가.,
3. 나의 약함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4.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느끼는가. 그렇든, 아니든, 이유는 무엇인가.
5. 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는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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