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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2025. 고린도전서 강해(26) 방언과 예언의 유익성. 고전14:1~14절

많은 사람들이 '더욱 큰 은사'라는 구절을 근거로 ‘영적인 은사’에 우열이 있다고 해석한다.(12:31) 하지만 이는 문맥을 무시한 해석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하는 핵심은 '공동체의 유익'이다.(고전10:24,33) 따라서 '더욱 큰 은사'란 공동체에 더 큰 가치와 유익을 줄 수 있는 은사를 의미한다.

     

이러한 '공동체 유익'의 관점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명확하게 비교하고 대조한다.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공동체의 덕’을 세운다는 것이다.(4절) 그 둘 중에 예언이 방언과 비교하여 공동체에 유익을 주기에 ‘더욱 큰 은사’라는 것이다. 이 두 은사를 비교해서 설명한다.

     

● 방언: 방언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1) 외국어 방언(알아듣는 언어): 실제 존재하는 외국어이다. 오순절 때에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을 이방인들이 알아들었다. (행2장)


2) 초자연적 언어(못 알아듣는 언어):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이다. 이 방언이 공동체에 유익이 되려면 반드시 '통변(통역)'의 은사가 필요하다. 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영적 교제와 기도 수단으로 사용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바로 이 '못 알아듣는 방언'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통역 없이 이 방언을 공적인 자리에서 남용하여 교회를 시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못 알아듣는 방언’은 공동체 안에서 모여서 기도할 때에는 하지 말거나 작은 소리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본인의 기도에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17절) 바울은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일만 마디’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낫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했다.(19절)

     

왜 바울은 이토록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공동체 안에서 하는 것을 경계하고 조심하라고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 방언과 연관된 이스라엘의 아픈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교만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쉬운 히브리어로 전한 경고를 비웃고 무시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시겠다고 선언했다.(사28:11) 결국 이스라엘은 그 경고를 알아듣지 못해 멸망했다.

     

바울은 이 사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공동체 안에서 자랑하듯 떠드는 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경고나 징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경악을 한 것이다.(21절)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에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진다. 방언은 ‘개인의 유익’을 위하여 준 것이다. 그렇기에 만일 개인이 아닌 대중 앞에서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여야 한다.

     

하나는 ‘복음 전파용’이다. 사도행전의 예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다른 경우는 ‘통변과 함께’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의 경우, 반드시 통변하는 사람이 있어 그 의미를 공동체에 전달해야 한다. 통변하는 사람이 없으면 잠잠해야 한다.(28절)


내가 하는 방언이 알아듣는 방언인가, 못 알아듣는 방언인가를 구분하여서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해서 그 은사가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이 될 것이다.

     

● 예언: 점쟁이들이 하는 예언과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점쟁이의 예언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는 본인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그 일을 행할 것을 미리 보고,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언은 완전히 다르다.

     

모세의 사례가 그러하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요구했다. 모세는 바위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능력을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온 후에 이 산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말씀하셨다.(출3:12) 즉, '일이 성취된 후'의 결과를 현재의 증거로 제시하셨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와 결과와 내용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미래를 붙들고 주관하고 있다"는 선언이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불림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의 인생이 보장된 자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뜻과 의지를 가지고 계시고 나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이것이 확인되는 것 보다 더 큰 위로와 격려와 유익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굳이 내 앞 날이 궁금해서 아둥바둥 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 인생이 주의 손에 있는 것을 깨닫는 것 보다 더 값지고 유익한 인생은 없기 때문이다.

     

신령한 은사는 그 자체로 선하지만, 신앙 성숙의 도구로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성숙을 위해, 또는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외부로부터 오는 신비로운 개입이나 영적 은사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가려는 태도이다.

     

신앙 성숙에는 지름길이 없다. 하나님은 예언이나 은사를 통해 우리를 쉬운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어려운 길을 걷게 하신다. 진정한 성숙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닌, 그 길을 통과해야만 얻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은 쉬운 길 대신 '함께하심'을 약속하신다. 그분은 인생의 마지막을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며 우리에게 기꺼이 그 고난의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동행하심을 믿고 인내와 소망으로 버텨낼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방언이 개인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은사를 받은 자와 못 받은 자의 생각을 나누어 보라.

3. 나는 나의 미래가 궁금한가?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 이유를 말해 보라

4. 모세나 히스기야가 받은 예언처럼 일이 성취된 후의 결과를 증거라고 하시면 내 반응은 어떠할 것 같은가?

5. 하나님이 ‘쉬운 길’이 아닌 ‘함께 하심’을 약속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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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는 말씀 (10.10.2025) ***

● 갈렙 회원분 점심 초대 안내 오는 주일(10월 12일), 2부 예배 후에 갈렙 회원분들을 위한 점심 식사가 준비됩니다. 이번 식사는 송정웅 집사님/송명자 권사님 가정에서 섬겨 주십니다.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주소는 갈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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