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2.방언과 예언의 유익성: 고린도전서 강해 핵심 분석
- Soo Yo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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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요약
본 문서는 버지니아 지구촌교회 이수용 목사의 고린도전서 강해 설교를 바탕으로, 신령한 은사, 특히 방언과 예언의 본질과 유익성에 대한 핵심 통찰을 정리한다. 설교의 주요 논지는 영적 은사의 가치가 개별 은사의 우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이라는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치 판단의 기준: 바울이 언급한 '더욱 큰 은사'는 은사 간의 영적 등급이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은사가 공동체에 더 큰 덕을 세우고 유익을 주는지를 비교하는 개념이다.
방언과 예언의 비교: 고린도전서 14장은 공동체 유익의 관점에서 방언과 예언을 집중적으로 비교한다. 방언은 통역이 없는 한 개인의 덕을 세우는 데 그치지만, 예언은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방언의 본질과 사용: 방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설어)와 초자연적 언어로 나뉜다. 특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개인의 영적 교제와 기도를 위한 것이므로, 공동체 예배 시에는 통변의 은사 없이는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통해 심판의 경고를 받았던 역사적 교훈과도 연결된다.
예언의 재정의: 성경적 예언은 미래를 점치는 '점술(Fortune-telling)'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신 전하는 '대언(Prophecy)'이다. 이는 미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미래를 친히 만들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계획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신앙 성숙의 길: 영적 은사는 신앙 성숙의 지름길이나 현실의 고난을 회피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영적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현실을 직면하고 하나님의 동행 약속을 믿으며 고난의 과정을 인내로 통과할 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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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령한 은사의 가치 기준: 공동체의 유익
설교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더욱 큰 은사'라는 표현이 은사들 간의 계층이나 영적 수준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시작한다. 이러한 해석은 바울이 바로 앞에서 모든 은사를 한 몸의 여러 지체에 비유하며 어느 것 하나 덜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한 내용과 모순된다.
'더욱 큰 은사'의 오해: 많은 사람들이 '더욱 큰 은사'라는 구절을 근거로 영적 은사에 우열이 있다고 해석하지만, 이는 문맥을 무시한 해석이다. 바울은 몸의 비유를 통해 각 은사의 동등한 중요성을 이미 역설했다.
사랑의 역할: '더욱 큰 은사' 뒤에 이어지는 사랑(고전 13장)은 또 다른 상위의 은사가 아니다. 바울은 사랑을 은사(gift)가 아닌 '길'(way) 또는 '원리'라고 표현한다. 즉, 사랑은 신자라면 누구나 모든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갖춰야 할 삶의 태도이자, 은사가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윤활유와 같은 원리이다.
핵심 기준 '공동체의 유익': 바울이 고린도전서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하는 핵심은 '공동체의 유익'이다. 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33)고 반복해서 가르쳤다. 따라서 '더욱 큰 은사'란 공동체에 더 큰 가치와 유익을 줄 수 있는 은사를 의미하는 비교급 표현이다.
방언과 예언의 대조: 고린도전서 14장은 이러한 '공동체 유익'의 관점에서 방언과 예언을 명확하게 비교하고 대조한다.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구절이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2. 방언의 은사: 개인적 유익과 공동체적 한계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유익한 은사이지만, 그 목적과 성격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설교는 방언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그 특성과 올바른 사용법을 설명한다.
방언의 종류
알아듣는 방언 (설어, Tongue Language): 실제 존재하는 외국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 때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자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선교지에서 배우지 않은 현지 언어(예: 케추아어)를 구사하게 된 사례도 이에 해당한다.
못 알아듣는 방언 (초자연적 언어):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초자연적인 언어로,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방언이 공동체에 유익이 되려면 반드시 '통변(통역)'의 은사가 필요하다. 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영적 교제와 기도 수단으로 사용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바로 이 '못 알아듣는 방언'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통역 없이 이 방언을 공적인 자리에서 남용하여 교회를 시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의 방언 사용 문제
개인적 유익의 한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는 유익할 수 있으나(고전 14:4), 공동체에는 아무런 덕을 세우지 못한다. 심지어 말하는 본인조차 "내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전 14:14)고 느낄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방해: 방언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신앙에 방해가 될 수 있으며, 감사의 기도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뜻을 알지 못해 덕이 되지 않는다(고전 14:17).
바울의 극단적 권고: 바울은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일만 마디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하며, 공동체 내에서는 소통 가능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역사적 경고: 이사야서의 교훈
바울은 이사야서 28장을 인용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심판의 징표: 과거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교만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쉬운 히브리어 경고를 비웃고 무시하자, 하나님은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앗수르 군대의 언어)으로 말씀하시겠다고 선언했다.
경고의 상실: 결국 이스라엘은 그 경고를 알아듣지 못해 멸망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공동체 안에서 자랑하듯 떠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이와 같이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경고나 징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이다.
방언의 올바른 사용 지침
따라서 방언 은사는 목적에 맞게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사적 사용: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영적 유익을 위해 혼자 있을 때 사용해야 한다.
공적 사용의 조건: 대중 앞에서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여야 한다.
복음 전파용: 사도행전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파하는 목적.
통변과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의 경우, 반드시 통변하는 사람이 있어 그 의미를 공동체에 전달해야 한다. 통변하는 사람이 없으면 잠잠해야 한다.
3. 예언의 은사: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대언
설교는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개념을 명확히 재정의한다.
성경적 예언의 정의: 점술과 대언의 차이
구분 | 점술가/일반적 의미의 예언 (Fortune-telling) | 성경적 의미의 예언 (Prophecy) |
개념 |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주는 행위 |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받아서 대신 전하는 '대언' 행위 |
내용 | 개인의 길흉화복, 미래 사건 예측 | 하나님의 뜻, 계획, 약속, 경고, 위로, 권면 등 (미래, 현재, 과거 모두 포함) |
근원 | 미지의 힘, 영적 존재 | 전능하신 하나님 |
유사 행위 | 점, 예지 | 설교, 하나님의 계시 전달 |
성경적 예언은 미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설교 역시 하나님의 뜻과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예언의 스펙트럼에 속한다.
하나님 예언의 본질적 특성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모세의 사례 (출애굽기 3장):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요구했다. 모세는 바위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능력을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온 후에 이 산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말씀하셨다. 즉, '일이 성취된 후'의 결과를 현재의 증거로 제시하셨다.
히스기야의 사례 (이사야서 37장): 앗수르 군대에게 포위된 히스기야가 구원을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군대가 물러갈 것이라는 증거로 "올해와 내년, 그리고 셋째 해에도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역시 위기가 해결된 '이후'의 평화로운 상태를 현재 구원의 증거로 삼으셨다.
핵심 차이: 점술은 '벌어질 미래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미래의 내용과 결과를 만들어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너의 미래를 붙들고 주관하고 있다"는 선언이다.
예언의 목적과 유익
이러한 예언은 공동체에 실질적인 유익을 준다.
하나님을 알게 함: 예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위로와 격려: 성도들은 예언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확인하며,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
덕을 세움: 예언은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을 주며 교회의 덕을 세운다. 이것이 바울이 방언보다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한 이유이다.
4. 영적 은사와 신앙 성숙의 길
설교는 영적 은사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제시하며 마무리된다. 신령한 은사는 그 자체로 선하지만, 신앙 성숙의 도구로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은사 사용의 위험성: 현실 도피의 함정: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성숙을 위해, 또는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외부로부터 오는 신비로운 개입이나 영적 은사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가려는 태도이며, 고통을 잊기 위해 마약 주사를 맞는 것과 같다.
진정한 성숙의 경로: 고난의 통과: 신앙 성숙에는 지름길이 없다. 하나님은 예언이나 은사를 통해 우리를 쉬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길을 걷게 하신다. 진정한 성숙은 고난을 피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통과해야만 얻어지는 열매이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은 쉬운 길 대신 '함께하심'을 약속하신다. 그분은 인생의 마지막을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며 우리에게 기꺼이 그 고난의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신다.
마지막 권면: 가정, 직장, 건강, 재정 등의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은 낭망하지 말고 현실을 견디고 부딪쳐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동행하심을 믿고 인내와 소망으로 버텨낼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