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025. 고린도전서 강해(25) 사랑이란 고전. 12:28~13:8,13절
- Soo Yong Lee
- Oct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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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모든 은사는 한 성령에서 비롯되었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12장을 끝내면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31절)고 한 뒤, 이어서 ‘사랑’을 소개한다.(13:1) 이러한 문장의 전개로 인하여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은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은사는 ‘선물’이다. 그렇기에 어떤 은사이든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이 있다.(e.g: 방언)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빠짐없이 주셨다. 또한 이와 동시에 사랑은 신자라면 반드시 누구나 해야 하는 삶의 방향이요, 태도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은사라고 하지 않았다. ‘길.way’라고 소개한다.(12:31)
그럼, 바울이 말한 ‘더 큰 은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14장의 ‘예언’이다. 예언이 방언과 비교해서 더 큰 은사라는 것이다.(14:1,5)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은사를 작동 시키는 작동 원리이다.
● 작동 원리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들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근본 원리를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가치 있게 사용된다. 즉, 은사를 매니지(manage)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모든 은사는 사랑 안에서만, 참된 가치를 가진다.
사랑은 마치 ‘악보’와 같다. 좋은 악기일지라도 악보가 없는 연주는 감동이 없다. 그러나 좋은 악보가 주어지고, 그 악보의 음표를 따라 연주하면 훌륭한 음악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특별히 이 사랑이라는 악보가 ‘하나님’이라는 지휘자의 손에 들어가면 기가 막힌 음악이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모든 은사를 조율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 신자의 본질
우리는 2절의 말씀인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2절)라는 구절을 ‘내가 성령의 모든 은사를 소유하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 행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I am nothing)’이다. 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바울은 12장에서 직분을 나열한다. 그 직분은 사도, 선지자, 교사와 같은 것으로서 은사를 수행한다.(28절)
이 직분은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을 방향으로 한다.(엡4:11~13절)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다. 무슨 말인가. 성경은 이런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변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을 요구함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에 영적인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좇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조차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 하셨다.(마7:23) 이는,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백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초월적 은사를 행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람인 것으로 현혹되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이들을 구분하는가. 그 은사를 통하여 자신이 높임을 받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가. 그 일을 행함으로 인하여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따라오는가를 봐야 한다. 그것이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이 사랑으로 비롯된다. 사랑은 어떤 고급화된 신앙의 수준이 아니다. 사랑은 신자의 본질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 즉, 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 사랑의 근원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의 수준을 판별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을 얼마나 나누느냐’와 ‘내 시간과 몸을 얼마나 헌신하는가’로 기준 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행동은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3절)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 무언가 다름을 의미한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 찾아온 한 율법 교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눅10:25~37)
예수님께 찾아온 한 율법 교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에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내가 누구를 도와야 하는가,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이 남긴 유명한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강도 만난 자,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인이다. 일반적으로 ‘내 이웃’이라고 하면 ‘강도 만난 자’를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도우라’고 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내가 도와야 할 대상을 역으로 대답하셨다.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그에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라고 물으셨다. 즉, ‘나’의 자리에 ‘강도 만난 자’를 대입하셨다.
무슨 말인가. ‘네 이웃이 강도 만난 자’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가 강도 만난 자’라고 콕 집어 주신 것이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지금 누구를 돕겠냐는 것이냐. 내가 보기에는 네가 구원이 필요한, 네가 치유가 필요한 강도 만난 사람이야.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것은 너야”라고 그의 현재 위치를 말해 준 것이다.
사랑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쏟아 부어져서 그것에서 흘러넘치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사랑이다. 이제 내가 누군가에게 불사르는 희생을 통해서 사랑을 보이려는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이전에 나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먼저 입는 것이다. 내가 먼저 그의 사랑이 필요한 ‘강도 만난 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인식이 없이 행하는 모든 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아직 모르는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사랑이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였는가.
3. 아무런 사랑의 감정 없이 봉사나 희생을 한 적 혹은 받은 적이 있었는가. 장단점을 말해보라.
4. 영적인 은사를 받은 자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 혹은 안 좋은 경험이 있는 적이 있었는가. 말해보라
5. 내가 ‘강도 만난 자’라는 것을 깨닫거나, 느낀 적이 있었는가. 왜 그렇게 느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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