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025. 고린도전서 강해(10) 묵은 누룩을 내 버리라. 고전5:1~7절
- Soo Yo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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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지역은 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시로 성적으로 아주 문란한 곳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 교인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하여 자유 했고,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근친상간이라는 방종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부도덕한 고린도 사람들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놀라운 것은 교회는 이를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두고 묵인하는 것을 교회의 자랑으로 여겼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죄를 범한 사람을 징계하지 않는 것’이 본인들의 영적인 성숙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왜곡된 현상이다.
● 복음의 왜곡
근친상간은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명백한 죄다.(레20:11) 그런데 사회적 풍조가 이런 성적인 것에 관대하니까 교회도 그 시대상을 좇아갔다. 또한 세상은 근친상간을 용납하지 않지만 교회는 이를 용납하는 것이 죄인을 사랑하는 방법이요. 기독교의 관용이라 여겼다.
바울은 성적인 죄를 지은 자를 쫓아내라(출교)고 명한다. 공동체와 단절하여, 교제를 하지 말라고 한다.(11절) 그런데 문제가 있다. 베드로는 ‘죄 지은 자를 사랑으로 덮어주라(벧전4:8)’고 한다. 바울과 베드로의 말 중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가. 누가 옳은가.
이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봐야 한다. 사실 바울과 베드로가 처한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베드로가 사랑으로 덮으라고 말을 한 것은 교인들의 과거의 죄, 예수 믿기 전의 죄이다.(벧전4:3) 현재 신자 중에 과거에 음란, 정욕 등의 향락을 추구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과거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라는 말이다.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신앙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세워주라는 뜻이다.
반면에 바울이 징계를 명한 것이 현재에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이다. 뿐 만 아니라, 그것이 죄인 줄 알지도 못하고 당당하게 행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징계를 해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이러하다.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은 죄를 지은 자에게 용기를 주고, 변화와 회복의 기회를 주는 사랑의 태도이다. 반면에 고린도교인들이 근친상간의 죄를 묵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방관이다. 그렇기에 바울과 베드로의 교훈은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나오는 전혀 다른 조치이다. 그런데 왜 고린도 교인들은 성적인 죄를 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 영지주의 사상
당시에는 영지주의 사상이 무르익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 사상의 특징은 구원은 특별한 지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육은 어차피 악하기에 육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영은 타락하지 않기에 육체가 죄를 짓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 특별한 지혜로 여겼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음란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우리의 영과 육은 떼어 놓을 수 없는 통합적 존재’임을 강조했다.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우리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전했다.(6:19,20)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있다. 바울이 그 죄인을 이렇게 징계하는 것이 ‘육신을 멸하고, 영은 구원 받는 것’이라 한 것이다.(5절)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바울의 평소의 언어 습관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쓴 책 전반에 걸쳐서 육(육체)을 ‘죄의 본성 혹은 죄악 된 행위’를 지칭할 때 사용했다.(롬8:5,갈5:24) 즉, 그의 ‘육신을 멸하고’라는 말은 ‘몸이 없어져 죽어도’라는 뜻이 아니다. ‘죄 된 성품이 깨끗이 됨’을 의미한다.
‘사탄에게 내주었다’라는 말 역시, 사탄에게 영혼을 파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자(사탄)의 세상으로 내 보냈다는 말이다.(5절) 즉, 출교를 의미한다.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 바울의 의도
바울은 그 죄인을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출교를 통하여 그가 세상에서 참혹함을 겪어서 결국에 그가 죄를 깨닫고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자기 교인들에게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어’ 그로 하여금 변화와 회복하게 하는 것과 동일하다.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려는 태도인 것에는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두 사람의 방법이 다를 뿐인 것이다. 베드로도, 바울도 죄 지은 자를 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들을 품고, 회개케 하고 다시 주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의도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성경의 구절만을 뽑아서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 내가 할 도리를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저마다의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대해야 한다. 어떠한 최선인가. 그의 영혼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 받게 하기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을 택하여 행해야 한다.(5절)
이 바울의 치리를 경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 그가 음행의 죄를 지은 자를 냉혹히 쫓아내라 했는가. 그 음행의 죄는 혼자 짓지 않는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 그 음행은 마치 누룩처럼 작게 시작하지만 온 공동체를 물들이게 된다.(6절) 그래서 잔인하지만 엄히 다루어야 한다. 묵은 누룩은 버려야 한다. 내 버리는 것만이 죄의 본성을 피하는 길이다. 이를 위하여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 모두에게 필요하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성경에서 규정한 죄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관습으로 인하여 죄의 인식이 약해진 것은 어떤 것인가.
3. 고린도 교회와 똑같은 상황이 우리 교회에 주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가.
4.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는가.
5. 교회 공동체에서 행한 치리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가. 무엇을 느꼈는가.